시간이 미친 듯이 간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은 빨리간다. 심리학자들은 기억할게 전혀 없기 때운이라고 한다. 기억에 저장되어 있는 내용이 않으면 그 시기기 길게 느껴지고 전혀 기억할게 없으면 그 시기가 짧게 느껴진다. 회상효과이다. 기억할게 없다는 이야기는 내 삶에 전혀 의미 부여가 안된다는 듯이다. 시간이 빨리 지나간다고 느낄 수록긴장야 한다. 의미 부여가 안되니 쉽게 좌절하고 자주 우울해시고 사소한 일에 서운해진
다. 이런 식이라면 성격 고약한 노인내가 되는 것은 아주 순식간이다. 미친뜻이 빨리가는 시간 전천히 흐르게 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기억 할일을 자꾸 만들면 된다. 평소에 빤하게 하던 반복되는 일들과 다른 것 을 시도하라는 이야기다. 인생과 우주전반에 관한 막연하고 추상적인 계획은 아무 도움이 안된다. 아주 주체적이고 감각적인 경험을 시도해야한다. 현재를 구체적으로 느끼며 살자. 그래야 시간이 미치지 않는다.
심리학적 개념을 익히면 사람들의 말과 행동 뒤에 숨겨진 또 다른 면을 읽어 낼 수 있다. 개념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다. 문화적 약속이다. 혼돈스러운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사람들은 개념을 안들어낸다는 이야기다. 일단 개념이 한번 성립하면 그 개념은 역으로 또 다른 실제를 만들어 낸다.
개념과 실제 사이에 성립하는 이와 같은 상호규정을 해석학적 순환이라고 한다. 개념이 세상을 바꾼다. 개념을 읽어내면 세상의 변화가 보인다. 특히 문화를 비교할 때 개념분석은 아주 효과적인 해석학적 도구다. 예를 들어 다른 문화에서 발견되지 않은 개념이 우리에게 있다. 정이다. 서구와 사랑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개념이다.
서양인들은 사랑하지 않으면 이혼한다. 사랑이 끝나면 관계도 끝난다. 그러나 한국인은 적어도 중년 이상 부부들은 서로 사랑하지 않아도 함께 산다. 그놈의 정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 그놈의 정이 개념적으로 더 유효하지 않기 때문에 한국 이혼율이 늘어난다. 정과 한국적 현실의 해석학적 순환이 이제 막을 내렸다는 뜻이다.
정이라는 권력담론이 해체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번화는 결과는 고스란히 중년 남자들의 몫이 된다. 더 이상 정이란 개념의 권력 프리미엄을 누릴 수 없는 불안한 한국 중년 남성들을 설명하는 개념이 새롭게 구성된다. 아저씨 이다. 물론 이전에도 아지씨라는 호칭이 있었지만문화적으로 특별한 의미를 갖는 개념은 아니였다.
반면 아줌마는 호칭인 동시에 개념이었다. 품위 없고 황당한 행동을 하는 중년 여성들을 이해하기 위해 아줌마 라는 호칭이 문화적 개념으로 전환되어 사용된 것이다. 아줌마에 비해 아저씨는 가치중립적 호칭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달라졌다. 이제 아저씨는 이제 무례하고 짜증나는 개념이다.
아줌마와 아저씨의 문화적 의미는 일부 겹친다. 그러나 아줌마는 어느정도 연민이 가능한 애교수러운 개념인 반면에 아저씨는 개저씨와 같은 공격적인 개념이다. 온갖 불쾌한 중년 남성들의 모습이다. 아저씨는 권력상실의 불안에서 시작하는 무례 분노 적개심 공격성의 총화다.
인간만의 독특한 상호작용이 언어습득을 가능케한다. 언어의 가장 중요한 상호작용은 순서 주고 받기다. 인간의 의사소동에는 남의 순서와 내 순서가 있고 내 순서에는 반드시 반응해야 한다는 인간 상호직용의 가장 기본적인 규칙이다. 인간 의사소통의 가장 근본적인 원칙이다.
성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다 남에게 순서를 제때 줄줄 알아야 한다. 상대방이 폼 날 때 순서을 줘야한다는 이야기이다. 자기만 이야기하는 사람을 만나면 기분이 나쁘다. 반대로 내가 폼 날 때 순서를 주는 사람을 만나면 기분이 참 상쾌하다. 유머감각이 좋아야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유머는 남에게 웃는 순서를 주는 가장 훌륭한 순서를 주고 받기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리더가 된다는 것은 훌륭한 사회자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상대방을 폼나게 만들어줘야 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사회적 지위가 높을 수록 남에게 순서를 안준다. 폼 날수록 자기만 이야기한다. 가끔 머쓱해서 썰렁한 농담을 던져보지만 아무도 반응이 없다. 인간은 절대 이런 방식으로 설득당하지 않는다. 대화가 아니라 강요 혹은 계몽으로 말이다. 그래서 사회직 지위가 높아질수록 스스로 옳다고 생각할수록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생각할수록 주위에 사람이 없는 것이다.
클래식한 정신분석학자들의 여자가 성숙하기 어려운 존재라고 생각했다. 성숙의 척도가 되는 초자아, 즉 슈퍼에고를 내면화하는 정신문석학적 기제가 여자에겐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로 상징되는 슈퍼에고의 사회적 가치와 도덕 거저 얻어시는 것이 아니다.
어머니를 사이에 두고 아버지와 경쟁하게 되는 아들은 거세불안이라는 근원적인 공포에 시달린다. 결국 아들은 아버 지를 들이받든가 아니면 착하게 아버지의 가치를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성숙해간다. 여자는 바로 이 성숙의 계기가 결핍되어 있다. 결핍되어 있다. 거세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프로이트가 살던 19 세기 정신분석의학의 한계다. 요즘은 반대다 최근의 심리학 이론들을 적용해보면 남자들의 성숙이 훨씬 더 어렵다. 아이들 발달과정에서 내면화하는 도덕적 규범들의 초기 형태는 사회적 참조(social referencing)리는 현상으로 설명된다.
낯선 상황 혹은 낯선 대상에 대한 아이들의 규범적 판단은 어머니 정서적 반응을 참조해 결정된다는 이야기다. 예를들어 난생처음 흑인을 보는 아이는 일단 어머니의 표정을 살핀다. 어머니의 당황해하거나 어색하하면 아이의 반응도 똑같아진다. 그러나 어머니가 아무렇지 않게 반응하면 아이의 반응도 편해진다.
이렇게 문화적 편견은 주변인들의 정서적 반응을 참조하는 과정을 통해 구제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사회적 소수집단에 대한 편견 또한 이런식으로 세대들 건너며 전달된다. 왜곡과 편견의 해소 또한 동일한 방식으로 가능하다.
사회적 참조는 사회의 규범과 가치들을 매개해 성숙을 가능케하는 문화학습이다. 문제는 이 사회적 참조에 엄청난 남녀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여자아이들은 사회적 참조는 문화적으로으로 장려된다. 남자아이들에 비해 정서적 표현이 훨씬 자연스럽게 여겨지기 따문이다. 반면 남자아이들의 정서 표현은 문화적으로 억압된다.
우는 것과 즐거움을 표현하는 것이 남자아이와 무슨 상관인가?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는 능력이 애초부터 악압되어 있으니 어찌 남의 정서를 읽는 능력이 발달할 수 없다. 남자들에게는 사회적 가치, 도덕적 규범을 내연화하는 사회화 절차가 기초부터 꼬여있다는 이야기다. 사회적적 참조가 불가능한 남자들에게 성숙한 의사소통을 기대하는 것은 참으로 무모한 일이다.
남자의 질투가 더 무섭다고 한다. 질투는 유치하고 비겁한 인간의 특징이 아니다. 인간의 문명에 나오는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질투와 문명의 상관관계에 관한 심리학적 알레고리(우화)이다. 인간 문명시작이 질투로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다. 결국 질투를 뜻하는 카인의 징표는 인류가 지속되는 한 영원히 떼어낼수 없는 인간의 본질이다.
현대 심리학은 카인의 징표가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과 깊은 관계가 있다. 돈과 행복의 관계를 연구한 영국의 심리학자 크리스토퍼 보이스는 수입이 많다고 무조건 행복한 것은 아니리고 주장한다. 사람들이 타인의 수입과 자신의 수입을 비교하면서 행복해한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행복이란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얻어진다는 이야기다. 객관적인 수입이 아무리 많아도 질투를 느끼는 대상이 있는 한 행복해할수 없다는 말이다. 질투는 자신의 불행한 상황을 벗어나려는 심리적 동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비교집단이다. 자신이 속한 집단이 모두 늘어나봐야 행복해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의 수입은 그대로 있고 내 수입만 늘어나야 행복해한다. 사회적 성취를 가능케한 심리적 동기의 대부분도 질투에서 시작된다. 내 비교 집단에서 아예 잘나가는 사람을 제외해버리는 것도 행복의 한 방법이다. 비교 자체가 아예 물가능한 사람들과 노는 것도 괜찬은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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